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돌아온 탕자>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1667년경, 죽기 2년 전에 그린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그의 마지막 대작인 이 그림은 1766년 러시아로 팔리게 되어
오늘날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세로 262 cm, 가로 205 cm 크기의 이 그림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폭격했을 당시,
4년 동안(1941년 7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우랄산맥 건너편 소금 광산에 비밀리에 옮겨져 있었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전 세계 그림 가운데서 도달할 수 없는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고있는 걸작입니다.
렘브란트의<돌아온 탕자>,1669, 캠버스에 유채화, 262 X 206 cm, 에르미타쥬 박물관 소장
등장 인물
우선 모든 시선들이 향해있는 두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도 자연히 머물게 됩니다. 시선이 모여진 그곳에는 한 노인네가 헐벗은 거지 모습의 청년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조아리고 있는(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작은아들의 헤어진 옷과 신발에서 그 삶이 비참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른 쪽 끝에는 큰아들이 아버지와 동생의 상봉하는 모습을 우뚝 선 위치에서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아들 사이에 검은 모자의 콧수염의 사나이와 어둠 속에 잠겨있는 두 여인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기둥 뒤에서 내다보는 한 여인이 중앙 상단에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 위쪽에 약간의
형체만을 드러내는 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쉽게 알아볼 수 없습니다.
작은아들의 묵상
아버지에게 돌아온 작은아들은 누더기의 속옷을 걸치고 거의 몸만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빡빡 깎여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었던지, 수용소에 있었던지, 이 모습은 개성을 박탈당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황갈색의 찢어지고 핏기 어린 속옷은 그의 참담했던 생활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샌달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달이 겨우 부분적으로 감싸고 있어 그의 삶이 얼마나
가난에 찌들렸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작은아들의
머리는 엄마의 자궁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모양이고 얼굴은 거의 아직 태아의 모습입니다. 램브란트는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안긴 인간의 모습을 엄마의 자궁 속에 있던 아기의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품에 안긴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큰아들의 묵상
그는 작은아들의 귀향에 대한 목격자입니다. 이 목격자는 아버지를 기쁨 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판관 같은 자세로, 현재의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뻣뻣하게 서 있습니다. 그는 법적인 편협함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사랑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포옹을 원하지도 않으며, 뒤에서 이
광경을지켜보고 있는 하인들까지 포함하는 일가족으로부터도 한 걸음 물러서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분명 작은아들과 그를 안고 있는 아버지이지만 큰아들은 이 그림 전체의 오른 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리를 두고 서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훨씬 아버지를 닮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수염을 길렀고 붉은 겉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적 유사성이 둘 사이의 공감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얼마나 다릅니까?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향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꼿꼿하게 서있고 긴 단장은 그의 자세를 더욱 강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묵상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모습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 안에 드러나는 신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염을 기른 반 실명 상태의 노인, 황금빛의 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돌아온 자식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절대적인 자애와 조건 없는 사랑, 영원한 용서와 같은 신성의 실재를 보게됩니다. 여기서 인성과 신성,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과 강인함, 늙음과 영원한 젊음이 함께 표현되고 있습니다. 거의 눈 먼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등을 육체적인 시력이 아니라 내적인 눈으로 보면서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핵심은 아버지의 손에 있습니다. 이 손에 모든 빛이 모여있고 이 그림의 다른 두 목격자들의
시선도 아버지의 손에 쏠려 있습니다. 그 안에서 자비와 화해와 용서, 치유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아들
뿐 아니라 아버지도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반 장님인 노인이 흐느끼면서 아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상처받은 아들을 축복하는 모습에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권위의 남성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이 그림의 손에서부터 드러나는데 재미있게도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들의 어깨를 만지는 아버지의 왼손은 매우 강하고 근육질입니다.
손가락들이 펼쳐져 있고 아들의 등과 어깨를 넓게 감싸고 있습니다. 일종의 누르는 힘과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특별히 엄지손가락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른손은 얼마나 다릅니까? 이 손은 누르거나 잡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섬세합니다. 손가락들이 모아져 있고 아주 우아합니다. 이 손은 아들의 등 위에 부드럽게 얹혀져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도감과 위로를 주는 엄마의 손인 여성의 손인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머리
죄수와도 같이 삭발한 작은아들의 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뉘우치는 모습입니다. 그 아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 머물고 있는 태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래의
고향인 하느님 품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시선
아버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선이 없음을 알게됩니다.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그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짓물러 멀게된 아버지의 눈은 초점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력을 상실한 노인은 눈이
멀기까지 기다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아버지의 손
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은 서로 다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왼쪽 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의 손이고 오른쪽 손은 매끈한 여자의 손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이 손을 통해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의 행색
황갈색의 찢어지고 핏기 어린 속옷은 그의 참담했던 생활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샌달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달이 겨우 부분적으로 감싸고 있어 그의 삶이 얼마나 가난에 찌들렸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림을 통한 묵상 -루카복음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 그림의 주제는 한 아들이 아버지한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객지로 떠돌며 사창가에서 모두 탕진하고
돼지먹이로 끼니를 때우다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를 받는다는 성경 루카복음 15장의 이야기입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는 새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 잡고, 춤과 풍류를 즐기는 성경의 장면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거지같이 해진 옷에 죄수처럼 머리를 깎고, 다 떨어진 신을 한쪽만 신은 채 무릎 꿇고 사죄하는
아들의 어깨에 늙은 아버지가 두 손을 부드럽게 얹고 용서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했습니다. 렘브란트의
심리적 통찰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성경의 의미를 해석했습니다. 그는 성경에 묘사된 입맞추는 첫 만남이 아니라 그 다음의 포옹과 용서의 감동적인 순간을 택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으로 인한 지난 날의 괴롭고 복잡했던 감정을 억제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사랑의 손길로 아들의 등을 어루만집니다. 용서와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은 깊은 품위와 함께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한없는 너그러움과 거룩함을 간직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편 돌아온 탕자는 너무 왜소하고 초라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인간상 속에서 화가 렘브란트는 예수가
죄 많은 인간에게 베푸는 속죄와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흰 수염과 핏기 없는 자비의
굳은 손, 그리고 그의 구부린 몸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장면을 실감케 합니다. 렘브란트는 색을
통해서 아버지의 어깨에 두른 긴 홍포와 아들의 누더기 옷, 아버지의 긴 백발과 아들의 아무렇게나
쥐어뜯긴 것 같은 머리를 너무도 강하게 대조시켰습니다. 사랑에 충만한 늙은 아버지의 인자한 얼굴과
흰 수염, 그리고 자비로운 손길을 밝은 빛으로 비쳐 강조합니다. 옆 계단 위에서 값진 옷과 화려한 모자를 쓰고 언짢은 표정으로 이들을 내려다보는 형제들은 어둡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빛은 사랑과 구원을, 어둠은 시기와 무정과 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램브란트(1606년~1669년)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randt van Rijn 1606-1669)는 네덜란드의 대학도시 레이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제분업자였고, 어머니의 집안 사람들은 제빵업에 종사했다. 그의 종교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는 캘빈교 신자였다. 반면에 렘브란트의 외가는 레이덴 전체가 신교를 채택했을 당시에도 여전히 가톨릭 신자로 남아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적 배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렘브란트(1606~1669)는 지나친 낭비벽으로 파산한 말년에는 아들에게 생활비를 의존해야만 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 약간의 빵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였지만 그는 주문자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렘브란트가 말년에 가난으로 가장 고통받았던 것은 빵이 아니라 화가에게 필요한
그림 수집을 멈췄던 일이다. 렘브란트는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된 말년에 성경을 표현하는 것에 주력한다. 렘브란트 말기작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돌아온 탕자’다. 렘브란트는 성경의 이야기를 표현하면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했다. 그는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에 자신이 걸어온 삶을 담아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죄의 용서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최후의 미완성 성화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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